[임도혁의 역사文化산행]경북 고령 미숭산-주산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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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도혁의 역사文化산행]경북 고령 미숭산-주산 2편
  • 김성서
  • 승인 2018.06.28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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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 봉분 크기는 신라 왕릉보다 작을지 모르지만 많은 수가 모여 있어 장관을 이루니 참석한 분들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편집자주] ‘충곡의 역사文化산행’=등산+역사文化유적지 탐방+맛집기행

임도혁 대전언론문화연구원 이사장(전 조선일보 충청취재본부장)은 오래 전부터 등산, 사진촬영, 문화재 등에 관심을 갖고 전국을 누벼왔다. 임 이사장은 최근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대전한마음토요산악회’의 산행대장을 맡아 역사문화산행을 기획, 지난해 11월 18일 경주를 시작으로 산행을 이어오고 있다. 임 이사장이 만든 ‘역사문화산행’은 역사문화 유적지 답사와 산행, 지역 맛집까지 하나로 결합시켜 처음으로 시도한 새로운 산행이면서 신개념 여행이다. ‘알고 보면 즐겁다’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앞으로 월 1회 게재한다.

 

3) 지산동 고분군(池山洞 古墳群)

사적 제79호. 경북 고령군 고령읍 지산리 산8번지. 814,816㎡.

봉긋봉긋 고분마다 옛 이야기가 주렁주렁 매달려. 옛 이야기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후기 가야의 맹주 ‘대가야’에 강력한 정치세력이 존재했다는 걸 증명한다. 주산 남동쪽 능선에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순장이 확인된 44호분을 비롯해 700여기의 무덤이 흩어져 있다. 고분군 규모는 길이 2.4㎞, 너비 100~200m에 달한다. 김해 대가야, 함안 아라가야, 창녕 비화가야 등 가야 지역을 통틀어 최대 규모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고 2020년 본 등재를 목표로 하고 있다. 주로 대형무덤은 산등성이의 위쪽에 많이 있으며 중형무덤은 산등성이의 중간 정도에 모여 있고, 작은무덤들은 대형무덤과 중형무덤 주위나 그 밑에 위치해 있다. 왕 및 귀족, 무사, 백성 등 위계에 따라 무덤의 위치 및 크기가 정해진 것으로 짐작된다. 

지산동고분군 답사는 세 번째이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1500년 전의 옛 공동묘지다. 안타까운 것은 일제강점기 총독부의 묵인 아래 공공연하게 수많은 고분이 마구 파헤쳐졌다는 점이다. 그 유물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심지어 금관은 녹여서 금괴로 팔렸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주인공 주변에 함께 묻힌 이들의 순장 석곽은 귀금속이 없기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점이 한가닥 위안이랄까. 유물은 주로 봉분이 큰 대형무덤에서 많은 양의 토기와 함께 금동관, 갑옷, 투구, 칼 및 꾸미개 등이 출토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4∼6세기 정도에 만들어진 대가야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문헌으로만 전해지던 순장이라는 매장풍습의 실체를 확인했다는 것 때문이다. 한 봉분 안에 여러 무덤이 나타나는데 딸려묻기(순장) 때문이다.순장을 생각하니 포근한 날씨임에도 한가닥 스치는 바람이 차갑다. 하지만 눈을 들어 전체를 훑어보면 땅 속에 묻힌 수많은 옛이야기와는 별개로 아름답기 그지없다.주변 산들은 모두 둥글둥글하다. 고분과 한 몸인 듯 잘 어울린다. 고분 길을 걷다보면 옛 가야인의 숨결이 들려오는 듯하다. 1500년 전으로의 시간여행은 경이롭고 신비롭다. 

(4) 대가야왕릉전시관 & 순장(殉葬)

발굴 당시의 44호분을 재현해놓은 왕릉전시관 내부(사진 왼쪽).길이 9m에 이르는 주석실. 가운데 왕을 중심으로 시종 또는 경호원으로 짐작되는 사람이 머리맡과 발치에 한명씩 순장돼 있다.

지산동고분 중 44호분을 실물 크기 그대로 재현해놓은 곳이다. 한눈에 당시의 무덤 구조를 잘 볼 수 있다. 

44호분은 발굴 결과 커다란 한 봉분 안에 여러 기의 석곽이 배치된 순장묘로 확인되었다. 주석실은 도굴돼 금관 같은 핵심 유물은 없으나 토기, 오키나와 산 야광조개로 만든 국자, 금귀걸이 등이 출토됐다. 많은 순장자와 껴묻거리(부장품)로 미루어 최고지배층인 왕릉으로 추정된다. 중앙에는 주(主)석실, 남(南)·서(西)석실 등 3기의 석실이 있고, 그 주위로 32기의 순장 석곽이 부채살 모양으로 펼쳐진 형태로 배치되었다. 순장자는 주실의 주인공 머리맡과 발치에 각 1명씩 2명, 2개의 부실에 각각 1명씩 2명, 32개의 순장 석곽 가운데 18기에서 22명이 발굴됐음을 고려하면 총 40여명이 순장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순장자들의 유골을 분석한 결과 50대 남성도 있고, 20대 여성도 있다. 하나의 순장 곽에 성인 남녀의 머리를 반대로 두고 합장한 것, 10세 정도의 소녀들만 합장한 것,성인과 여아를 합장하는 등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순장자는 시종, 무사, 일반백성 등으로 구성된다. 

나는 그 시절로 되돌아가 잠시 왕을 만났다. 

충곡: 내세에서도 지금처럼 모든 것을 누리고 살겠다는 왕의 욕심이 너무 이기적이지 않나요? 

왕: 순장하는 저들은 평소 목숨을 다해 내게 충성을 서약한 사람들이다. 나와 생사를 같이하는 것은 당연하다. 

충곡: 충성을 맹세했다고 죽음까지 강요하는 것은 지나칩니다. 그리고 일반 백성도 많습니다. 심지어 어린 소녀까지 있는데 이들도 충성을 맹세했나요? 확실하지도 않은 다음 세상에서 자신의 평안을 위해 남의 생명을 강제로 빼앗는 이기심의 극치입니다. 

왕: 험험. 그대신 내세에서 저들에게 더욱 잘해주겠다. 그럼 되지 않나? 

충곡: 내세요? 죽음이 무서워서 내세라는 말이 나온 것 아닐까요? 내세가 확실히 있습니까?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 안해보셨나요? 설령 신이나 하느님라 해도 죽음을 강요할 권리는 없습니다. 

왕: 알겠네. 쿨럭! 

순장(殉葬)은 지배자의 죽음을 뒤따라 피지배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매장 직전 강제로 죽음을 당해 지배자의 시신과 함께 묻는 장례 습속이다. 계세사상(繼世思想)에 따라 저승에 가서도 이승 그대로 누리라는 의미이다. ‘결초보은(結草報恩)’이란 고사성어도 어원이 순장과 관련돼 있다. ‘미망인(未亡人)’이란 말도 순장과 관련해 해석할 수 있는 단어이다. 무덤 주인공을 위해 순장자의 생명이나 의사는 무시해버리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풍습이다. 결국 502년 신라 지증왕은 순장을 금지한다. 불교의 새로운 내세관이 도입되고 아까운 노동력이 상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후 상징적으로 작게 만든 토용(土俑)으로 순장을 대체하게 된다. 

우리 일행을 비롯, 전시관과 박물관엔 제법 사람이 많다. 비록 모두 도굴을 당했을 지언정 1500년 전의 고분 수백개가 이렇게 양지바른 곳에 옹기종기 모여 관광객들을불러들인다는 것은 고령의 큰 복이다. 아니 무려 1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후손들에게 보살핌을 받고 있는 대가야인들이 더 큰 복일지도 모르겠다. 

(5) 대가야박물관

지산동 고분분에서 발굴된 토기들. 광택이 없어 투박하지만 조형미는 뛰어나다.

대가야박물관은 1층 기획전시실과 2층 상설전시실로 이뤄졌다. 기획전시실에선 해마다 주제를 바꿔 1년간 새로운 유물들을 전시한다. 전시실에서 우리는 대가야의 화려한 역사를 알려주는 그릇받침, 그릇 등 숱한 토기류를 만난다. 토기들은 거친 질감 속 부드러운 곡선의 형태미와 안정감이 특징이다. 굽다리접시(高杯) 등 유약을 바르지 않은, 한번만 구운 토기여서 도자기와 달리 광택이 없다. 하지만 새겨진 무늬와 장식은 제법 정교하고 아름답다. 광택이 없어 그렇지, 조형미는 요즘 밥상에 올려놓아도 부족하지 않은 멋진 그릇들이다. 

녹이 슬어 볼품은 많이 떨어졌지만 투구와 갑옷, 말꾸미개 등은 정교함을 보여준다. 전시물 중에서 가장 눈에 띄기는 역시 금관과 금귀고리 등이다. 안타까운 점은 진품이 아니라 모조품이라는 사실이다. 국보 제138호 ‘전(傳)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은 삼성 리움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도굴로 세상에 나왔고 그걸 이병철 회장이 구매한 것이어서 지산동고분군에서 나온건 확실하지만 어느 고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대가야 중심의 건국 설화라고 볼 수 있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가야(伽倻)는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는 하늘의 신 이비가(夷毗訶)에 감응해 아들 둘을 낳았다. 첫째 뇌질주일은 고령 대가야의 이진아시왕이 되고, 둘째 뇌질청예는 김해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된다. 마침 얼마전에 해인사에 들러 국사당 내 그림을 구경한 바 있다. 아무튼 가야는 기원전후 지금의 경남북 일부를 중심으로 처음 성립돼 기원후 1세기쯤 연맹체를 형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가야사는 아직 명확히 정립되지 못했으며, ‘가야’라는 이름의 뜻도 학설이 분분한 실정이다. 

다만 가야사 전기인 3~4세기엔 김해의 금관가야, 5~6세기에는 고령의 대가야가 연맹체를 이끌었다. 하지만 532년에 금관가야, 562년에는 대가야가 신라에 무너진다. 약 500여년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존속하면서 토기, 철기문화가 발달했다. 존속 기간, 영토 면적, 문화 수준 등 무엇으로 보나 엄연히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고대국가의 한 축을 형성했음에도 왜 우리 역사에는 3국으로 자리잡고만 있을까? 일단은 역사 기록이 삼국유사에 가락국기(駕洛國記)를 요약한 글만 전해질 정도로 기록이 부족하다. 

그 바람에 이름조차 가야, 가락, 임나 등으로 확실치 않은 실정이다. 아마 우리 고대 역사서인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목이 ‘삼국(三國)’으로 붙여진 것도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또한 가야는 줄곧 연맹체를 유지해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는데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었고 그 바람에 손쉽게 신라에 복속당하면서 존재감이 약했던 것도 한 원인 아닐까? 일제 강점기 ‘임나일본부설’로 학계에서 연구를 기피했다는 점도 망각된 역사를 만든 원인으로 꼽힌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의 언급으로 가야에 대한 관심과 예산이 커지면서 좀 더 활발할 연구가 기대된다. 머지않아 가야는 조금 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6) 개실마을 & 金宗直

점필재 김종직 종택의 사랑채. 커다랗게 써서 걸어놓은 '문충'이란 이름에서 이 집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개실마을은 영남사림의 종조 김종직의 후손인 일선(선산)김씨 60여가구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마을 앞뒤의 물과 산, 기와집과 논밭, 대밭과 솔숲이 어우러져 풍광이 빼어나다. 개실마을에선 예절 교육, 전통음식 만들기 등의 체험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선산 김씨 문충공파(善山金氏 文忠公派) 종가인 점필재 종택, 김종직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지방유림이 건립한 강학지소(講學之所) 도연재가 볼만하다. 하지만 종택은 상중(喪中)이며, 도연재는 문을 잠가 관람하기 어렵다.

이 마을의 제일 웃 어른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조선 도학의 정통 맥을 이은 학자이다. 그래서 사림의 영수, 영남학파의 종조(宗祖) 같은 별명이 따라 붙는다. 문하생으로는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김일손(金馹孫), 남효온(南孝溫) 등이 있다. 제자 모두가 쟁쟁한 인물이다. 이 중 문묘에 배향된 사람이 둘이나 된다. 정치적으로는 성종의 총애를 받아 자기의 문인들을 관직에 많이 등용시켰으므로 훈구파(勳舊派)와의 반목과 대립이 심하였다. 

김종직이란 이름이 특히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조선 도학의 맥을 잇는 쟁쟁한 제자를 둔 것뿐 아니라 첫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도 있다. 김일손이 바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어 빌미가 됐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김일손은 능지처참, 정여창과 김굉필 등 김종직의 제자들은 대거 유배됐다.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7) 뒤풀이 

뒤풀이로는 고령 대원식당에서 1인분에 8,000원 하는 인삼도토리수제비를 먹었다. 대전에 예상보다 1시간 빠른 19:00 도착했다. 

♠나오며 

고교 시절 교과서에 실린 이양하 수필 ‘페이터의 산문(散文)’. 감수성 예민했던 당시 감동하며 읽고 또 읽었던 부분을 떠올린다. 

‘사람은 나뭇잎과도 흡사한 것/ 가을 바람이 땅에 낡은 잎을 뿌리면/ 봄은 다시 새로운 잎으로/ 숲을 덮는다.’ 

이양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페이터 이중 누구의 말인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이들에게 공통한 것이라곤 다만 그들의 목숨이 짧다는 것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마치 그들이 영원한 목숨을 가진 것처럼, 미워하고 사랑하려고 하느냐? 얼마 아니 하여서는 네 눈도 감겨지고, 네가 죽은 몸을 의탁하였던 자 또한 다른 사람의 짐이 되어 무덤에 가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실체는 끊임없는 물의 흐름, 영속하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그리고 바닥모를 시간의 심연은 바로 네 곁에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들 때문에 혹은 기뻐하고, 혹은 서러워하고, 혹은 괴로워한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 아니냐. 무한한 물상(物象) 가운데 네가 향수(享受)한 부분이 어떻게 작고, 무한한 시간 가운데 네게 허여(許與)된 시간이 어떻게 짧고, 운명 앞에 네 존재가 어떻게 미소(微小)한 것인가를 생각하라’

2018.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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