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를 위한 죽음”…문대통령 참배한 열사 3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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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를 위한 죽음”…문대통령 참배한 열사 3인은
  • 최정
  • 승인 2019.05.18 13: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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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김완봉 청년‧군인들에 빵 나눠주다 죽음 맞아
학생 구타에 시위 참여한 조사천 ‘꼬마상주’ 사진 남아
고교생 안종필 가족 만류에도 도청 지키다 끝내 숨져
80년 5월 당시 외신에 소개된 '꼬마 상주' 사진. 80년 5월20일 공수부대원들에게 구타당하는 학생들을 보고 참지 못해 시위에 참여했다가 숨진 아버지 조사천씨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는 아들 천호군(당시 5세). 5.18기념재단 제공

문재인 대통령이 광주 5·18국립묘지에서 참배한 고 김완봉·조사천·안종필 등 3인의 열사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18일 오전 광주 북구 망월동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문 대통령은 김완봉, 조사천,안종필 열사 묘역을 차례로 참배했다.

문 대통령은 처음으로 김완봉 열사 묘지를 찾았다. 80년 5월 당시 무등중학교 3학년이던 김씨는 15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김씨는 1980년 5월 21일 어머니 송영도씨와 함께 '금남로 청년들에게 빵과 우유를 사다 주라'는 부탁을 받고 도청에 갔다 돌아오지 못했다.

김씨는 어머니와 함께 시민군, 군복을 입은 계엄군까지 모두 같은 시민들이라며 빵과 우유를 쥐어주고 투쟁하는 시민군을 응원했다.

하지만 이날 빵을 들고 군중 속으로 들어간 김씨는 그 후로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송씨는 자신이 빵을 쥐어줬던 군인들에 의해 아들이 죽었다는 죄책감을 덜 수 없었다. 그후 제2대 유족회장으로 투쟁의 선두에 나섰다.

그는 5월 열사들의 명예와 꿈을 되찾기 위해 온 노력을 기울였다. 김씨의 어머니로, 5월의 어머니로 5월 광주의 피비린내 나던 사건의 진상을 밝혀줄 것을 요구하며 싸웠다.

시민이자 어머니에서 투쟁의 상징이 된 송씨는 문 대통령과 아들의 묘비를 한참 내려다봤다.

완봉씨의 묘비에는 '열다섯 살 너의 죽음이 조국의 자유와 민주를 위한 값진 것이었음을 우리 모두 기쁘게 생각한다.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너를 죽도록 사랑하는 형과 누나가'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을 마친 후 희생자 고 김완봉의 묘역을 참배하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다. 이날 기념식에는 각계대표와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유족, 일반시민, 학생 등 5,000여 명이 참석했다. 뉴스1

문 대통령은 이어 조사천 열사를 참배했다. 5·18 항쟁을 대표하며 전 세계인들이 다섯살짜리 꼬마의 눈에서 5월의 아픔을 읽은 '꼬마 상주' 사진 속 영정의 주인공이다.

조씨는 5월20일 광주교육대학교 정문에서 공수들에게 학생들이 구타당하는 것을 본 후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튿날 시위에 참여했다.

조씨는 도청 앞 계엄군이 쏜 총을 맞고 쓰러졌다. "나 총에 맞았다"고 말을 할 수 있는 정도였지만 수많은 환자들로 아수라장이 된 기독교병원에 옮겨진 후 손쓸 겨를 없이 그대로 유명을 달리했다.

3대 독자인 사천씨는 빈소를 지켜줄 친척 하나 없었다. 다섯살 난 아들 천호군이 상복을 입고 '꼬마 상주'가 됐다.

당시 외신기자의 카메라에 잡힌 '꼬마 상주'의 사진은 80년 5월 시민들이 신군부에 저항하고 투쟁했던 5·18정신과 더불어 또 다른 5월의 아픈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와 유가족들이 18일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5.18 당시 가두방송을 했던 박영순씨의 상황극을 관람하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이날 기념식에는 각계대표와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유족, 일반시민, 학생 등 5,000여 명이 참석했다. 뉴스1

마지막으로 문 대통령은 당시 고등학생 신분으로 시민군에 합류한 안종필 열사 묘소를 찾았다. 당시 광주상업고등학교 1학년생으로 80년 5월 19일부터 항쟁에 참여했다.

22일 저녁에 가족들이 "그러다 개죽음 당하면 너만 손해다"라며 극구 말렸다. 형은 가지말라며 안씨에게 손찌검까지 했다.

하지만 종필씨는 단호했다 "이번 죽음은 절대로 개죽음이 아니다"며 끝까지 투쟁에 참여했다.

그날 저녁 몰래 집을 빠져나와 시민군에 합류한 종필씨는 27일까지 도청을 지키다 계엄군의 총탄에 그날 새벽 짧지만 굵은 삶을 마감했다.

당시 종필군은 어렸지만 강했다고 전해진다. "시체가 무섭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들의 죽음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 비참한 것"이라고 단호히 말하기도 했다.

종필씨의 묘비에는 "종필아 살아남은 자로서 부끄럽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갈게 너의 숭고한 정신 이 땅의 민주화에 길이 빛나리라.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너를 죽도록 사랑하는 형과 누나가"라고 적혀있다.

이날 문 대통령은 '살아남은 자'로 살아가는 시민들의 마음이 오롯이 담긴 묘비를 어루만지고 함께 참배한 5월 가족들을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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