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패턴을 통한 아름다움…기계·인간 조화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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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패턴을 통한 아름다움…기계·인간 조화 필요”
  • 김찬혁 기자
  • 승인 2019.12.03 17: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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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행 ETRI 연구원 인터뷰…‘코드로 그린 그림’ 전시
픽셀스택·스타스왑·라인그리드 등 코딩 활용해 창작
“연구단지 내 과학·예술 융복합 위한 물리적 공간 필요”
화학연 디딤돌플라자 전시공간 ‘Space C#’에 걸린 자신의 그림 옆에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주행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책임연구원. 김찬혁 기자

대전에서 과학과 예술을 결합한 전시가 마련돼 사람들에게 신선한 영감을 주고 있다. 바로 컴퓨터 코드를 이용해 만든 작품 ‘코드로 그린 그림’ 전시다. 12월 현재 옛 충남도청과 한국화학연구소에 전시된 ‘코드로 그린 그림’들을 제작한 사람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지능로보틱스연구본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주행 책임연구원이다. 

ETRI에서 인간-로봇 상호작용 및 인공지능(AI) 분야를 연구하는 공학자이자 연구자인 이 연구원이 오늘날 예술성이 가미된 그림을 창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3일 대전시 유성구 한국화학연구원 디딤돌플라자에서 그를 직접 만났다. 화학연 디딤돌플라자 1층에 위치한 전시공간 ‘Space C#’에서는 이 연구원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 연구원의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10월 18일 대전 사이언스페스티벌의 일환으로 기초과학연구원(IBS)에서 4일간 ‘코드로 그린 그림 #1’을 전시한 데 이어 지난 11월 16일부터는 옛 충남도청사 일대의 소통협력공간 ‘커먼즈필드 대전’에서 전시기획 ‘과학을 입히다’의 일환으로 ‘코드로 그린 그림 일부’가 걸렸다. 

그동안 전시된 이 연구원의 작품을 액자수로 따지면 100여개에 달한다. 연작 시리즈만 24개에 이른다. 본업인 연구에 종사하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공학자임에도 예술 창작을 시작한 계기에 대해 이 연구원은 스스로를 ‘처음부터 수학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이 연구원은 전산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며 컴퓨터 그래픽스를 전공했다. 박사 학위를 받은 이후 지난 26년간 공학적인 목적에서 그림을 그려온 셈이다. 

자신의 그림을 설명하고 있는 이주행 연구원 모습. 이 연구원은 '픽셀스택(Pixel Stack)'이라는 컴퓨터 코드를 통해 기존 이미지를 추상적인 패턴을 가진 이미지로 탈바꿈시켰다. 꽃 사진은 모두 대전수목원에서 이 연구원이 직접 촬영한 것이다. 김찬혁 기자

요가 경력 12년차인 이 연구원은 “예술을 목적으로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었다”면서 “요가나 산책 도중에 떠오르는 상상이나 아이디어를 틈틈이 그려왔다”고 말했다. 그는 “짧은 시간에 어렵지 않은 코드를 가지고서 그림을 그린다”며 “그 코드에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입력했을 때 생겨나는 우연한 효과를 눈 여겨본다”고 설명했다. 

그러던 중 3, 4년 전부터 이 연구원이 자신이 그린 그림을 페이스북에 올리기 시작하면서 입소문이 퍼졌다. 이후 지난 10월 대전에서 열린 과학·예술 융복합 행사 ‘2019 ARTIST NEST’에 출품 제의를 받은 이 연구원은 이를 흔쾌히 승낙했다. 이 연구원은 “예술과 기술의 경계라는 행사의 의미가 제 그림과 잘 맞아떨어졌다”며 “화면으로만 보던 그림이 인쇄물로 만들어진다면 또 어떤 의미를 전하게 될까 궁금했기 때문에 저로서는 일종의 실험이었다”고 회고했다. 

그간 이 연구원의 작품들은 예술계와 연구계로부터 '현대의 문인화'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문인화는 과거 전문화가가 아닌 시인이나 학자가 그린 동양화를 일컫는 말이다. 이 연구원은 “붓으로 글공부를 하던 선비들이 그 붓을 이용해 그림을 그린 것과 마찬가지로 저 또한 공학적인 그림을 그리던 프로그램을 이용해 과학과 예술의 경계에 선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이러한 주위의 평가를 스스로도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코드로 그린 그림 제작 과정이 담긴 전시 영상. 김찬혁 기자

이 연구원이 ‘코드로 그린 그림’을 제작하면서 사용한 방식은 ‘픽셀스택(Pixel Stack)’·‘스타스왑(Star Swap)’·‘라인그리드(Line Grid)’로 크게 3가지다. 모두 이 연구원이 직접 고안한 방법들로, 이를 이용한 창작은 그가 직접 찍은 사진들을 코딩을 통해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가령, 꽃이 담긴 이미지에서 각 색상별로 픽셀 정렬을 다르게 하거나 두 이미지를 결합, 하나의 형식에 전혀 다른 색상을 입히는 식이다. 어떤 제어값을 주느냐에 따라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미지가 탄생하기도 한다. 이 연구원은 이 같은 변화를 ‘분배와 재조합’이라는 단어로 설명했다.  

이를 위해 ‘매스매티카’라는 수학과학용 계산도구를 사용하는 이 연구원은 “파이썬이나 C언어보다 직관적이라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지난 10월에는 소프트기업 Wolfram Research로부터 매스메티카를 이용한 픽셀스택을 고안하고 이를 인공지능을 위한 가상학습셋(인공지능이 기계학습에 사용하는 자료 집합) 생성에 활용한 공로로 'Wolfram 혁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날 화학연 전시공간 'C# space' 앞에서 이 연구원은 과학·예술 융복합을 위한 물리적인 공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융복합을 위해서는 예술가과 과학자가 만나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교류하는 공간이 필요한데 대덕연구단지 내에 그런 공간이 많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어 “연구단지에 창의적인 생각을 가진 연구자들이 많다”며 “물리적인 공간에서의 소통을 통해 더 많은 ‘문인화’가 발굴됐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밝혔다. 

아울러 이 연구원은 4차산업혁명 담론과 관련해 기계와 인간의 역할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패턴을 파악하는 기계의 능력이 인간을 앞선 오늘날 인간이 무조건 우월하다는 인식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그렇다고 막연히 기계를 두려워하는 시각 또한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코드로 그린 그림’이라고 하면 차갑고 기계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지만 이 작품들을 만드는데 컴퓨터는 연산을 할 뿐이고 상상을 떠올려 이미지를 넣고 제어변수를 만들고 무엇보다 도출된 결과 가운데 취향과 능력을 통해 작품을 선별하는 것은 모두 인간인 저의 역할”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계와 인간, 이 둘의 장점을 적절히 활용하는 게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형식에 전혀 다른 꽃 사진의 색상을 입힌 전시물. 김찬혁 기자

마지막으로 과학과 예술의 공통점을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꼽은 이 연구원은 “공학이나 예술이 저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제가 그린 그림이 관객에게도 질문을 던지면 좋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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